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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무 비제이 김오이의 일상다반사

8. 낙엽(1994년 대동일보 대동여성 백일장 일반부 산문장원) 본문

엄마의 꿈

8. 낙엽(1994년 대동일보 대동여성 백일장 일반부 산문장원)

유튜브김오이 2018. 2. 1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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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방 조그만 창에서 올려다 보이는 성암산 자락이 이즈음 서서히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다. 때로는 안개 속에서 때로는 빛나는 햇살 아래서 갈참나무 잎이며, 은백양 잎, 망개나무 넓은 잎이 붉게, 노랗게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팔짱을 낀 채 자주 그 곳을 바라본다.

 푸른 싱그러움이 가득해 있던 지난 여름은 그 나무들의 예쁜 냄새 때문에 황홀했었다. 조금만 큰길로 나가도 매연 때문에 숨쉬기가 거북한 나는 의식적으로 내 후각을 성암산 쪽으로 열어놓고 생활했었다. 

 그러나 이즈음은 왜 이런지 자꾸만 가슴이 저리다. 점점 가을색 짙어져가는 산을 보며 내 삶의 걸어온 곳과 걸어갈 곳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내 어머니... 이제 걸어갈 곳을 더 적게 남겨 두시고 내 고향 마을에서 쓸쓸히 살고 계시는 내 어머니는 저기 저 불타는 단풍이실까... 떨어질 날을 눈 앞에 둔 채 돌아갈 채비를 하고 계시는...

 어머니는 진성 이씨 가문에서 나셨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태가 곱고 범절이 바르게 자라나신 어머니께서 결혼 후 어떻게 그런 신고(辛苦)의 삶을 견뎌내셔야 했는지, 나는 늘 운명이란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린시절,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자애로우셨다. 꽃을 좋아하셔서 장독대 가에 채송화며 봉숭아, 키가 큰 노란 물국화, 수줍은 분홍 빛깔의 꽃잎이 탐스럽게 많던 재래종 장미꽃, 칸나의 초록잎을 키우셨던 어머니는 그러나 늘 일로 바쁘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짓고, 들일이며 밭일을 아버지와 함께 해 내셔야 했다. 작은 땅을 일구어 그럭저럭 삶을 꾸려가고 있던 터라 어린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닌 무지막지하게 어머닐 학대하셨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할머니가 다 내다 파셧고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홀치기를 하여 우리들 공책값을 대 주셨다.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어머니는 우리들의 의연한 성(城)이셨다. 그 질곡의 상황을 흔들리지 않고 견뎌 내는 모습이 철들어서 내게는 눈물겨웠다.

 보리 까끄라기가 한창 많이 날아다니던 여름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굳건한 성이셨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쓰러지셨다. 볕은 쨍쨍 내려 쬐는데 읍내 병원까지 갈 일이 막막하였다. <계속>... -1994년 10월 6일(목요일) 대동일보 11면-


<계속> 그 당시만 해도 마을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고, 전화도 없어 택시를 부를 형편도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리어카에 태우셨다. 우리 4남매는 그 뒤에 매달려 따라갔다. 어머니는 땀을 비오듯 흘리시며 의식을 잃고 계셨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나는 그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주사를 한대 맞으시더니 깨어나셨다. 의사는 별 징후를 발견 못했고 어머니는 그날 바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이십 년 가까이 별탈 없이 살아오셨다. 그사이 그렇게 극악스럽게 구시던 할머니께서 중풍으로 몸져 누우셨고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모질게 한 죄값을 받으시는 거라고 마음 속으로 차갑게 할머니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표정도 없으셨다. 그저 묵묵히 할머니 진지를 지어 드리고, 대소변을 받아 내시고, 머릴 감겨 드리고 냄새 나는 빨래들을 하시고... 묵묵히 5년을 그렇게 감당해 내셨다. 삶의 고통들에 대한 체념이신 듯 혹은 달관이신 듯 어머니 얼굴은 늘 평온하셨다.

 할머니 별세 후 나는 결혼을 했고 결혼 후 두번째 맞이하는 겨울은 유난히 추웠었다. 그해 겨울에 백일을 갓 넘긴 첫째 아이가 몹시 앓았다. 우유만 먹으면 좍좍 토해 내는 통에 우리는 소아과 병원을 쫓아 다니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위로 들어가는 문이 꼬였을 가능성이 크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안절부절 못하던 때 친정 어머니 수술 소식을 들었다. 신장염이 악화돼 콩팥 한 쪽을 절제해야 된다고. 그때서야 나는 그 여름날 어머니께서 의식을 잃으셨던 복통이 신장염 초기 증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 보셨더라면 이런 수술까지는 안해도 되었을텐데...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죄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내 아이 때문에 수술하실 때 가보지도 못했다. 위험이 그렇게 큰 수술이었다는데...

 다행히 수술 결과는 좋았고, 지금도 어머니 건강은 그만그만하시다.

 이제 어머니는 우리 사남매를 다 길러 내셨다. 집안 형편도 어머니의 검소한 살림솜씨 덕에 많이 나아졌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건강하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나의 성이었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엔가는 가셔야 할 곳이 따로 있음을 알기에 가슴이 저리다.

 내 삶의 태반(胎盤)이셨던 어머니.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한 번도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으셨던 고마우신...

 이제 인고와 경건의 삶 끝자락 어디쯤에 서서 떨어져 흙으로 회귀할 날을 담담히 기다리고 계시는 내 어머니.

 여름의 싱그러운 초록과 가을의 불타는 단풍으로 살고, 이제 가볍게 땅위에 몸을 뉘인 낙엽들은 대지로 돌아가 다시 이 땅에 초록 생명들을 가득 일으켜 세우리라.

 어머니의 인고 위에서 초록 생명으로 일어난 우리들 역시 내 아이들을 위해 나뭇가지를 내어주고 지상으로 낙하하여야 할 때가 오리라.

 그래.

 삶은 이런 반짝이는 한 순간이다. 낙엽으로 떨어져 내리기 전의 내 삶에 정갈한 빛깔의 꽃과 유익한 열매와 아름다운 단풍의 날을 꿈꾸며 나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안개 긴 가을날 아침, 반짝반짝 물들며, 기꺼이 담담히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리라. 곱고도 아름답게.   -1994년 10월 7일 대동일보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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