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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무 비제이 김오이의 일상다반사
2. 5년만에 추인받은 결혼(콩트) 본문
사위 절받고 집나선 아버지 저물도록 안돌아와
결혼허락 못받고 돌아선 이후 그리움의 세월들
의성을 지나면서 길은 비포장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줄곧 말이 없었다. 남편의 굳어진 옆모습을 보며 5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이 길을 함께 왔었다. 집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사립문 밖에서 돌아서면서 울음이 쏟아졌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나친 처사에 섭섭하고 서러웠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냉수 한 그릇으로 예를 올리고 시작한 결혼 생활이 이제 5년째였다. 그동안 남편도 나도 친정집에 대한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았었다. 꿈길마다 그 골짝을 더듬어 사립문 밖을 서성이곤 했지만, 그 그리움은 당분간 마음속에 묻어 둘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기반을 잡은 뒤에 아버지를 찾아뵐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런데 어제,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빈 트럭에 남편이 세탁기 한 대를 싣고 왔다. 이제 한번 처가에 가 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기쁨과 고마움으로 가슴이 와락와락 뛰었다. 올해가 아버지 회갑이 드는 해라 더이상 부모님과 등 돌리고 살아서는 안되는 거라고 조바심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옥산에서부터는 개울을 따라 달렸다. 자갈길을 덜컹거릴 때마다 뒤에 실은 세탁기가 상할까봐 가슴 조였다. 늘 어머니가 손빨래를 하실 걸 생각하면 마음 쓰렸었다.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님 속만 태우고 그렇게 떨어져 사는 게 죄스러웠던 것이다. 이제 세탁기라도 사다 드리고 돌아오면 마음이 좀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또다시 사립문 밖에서 돌아서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어두워오는 하늘은 금방 눈이라도 뿌릴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덜컹길 산곡을 따라 달리는 게 두려웠던지 민이는 품을 파고 들었다. 낯선 산과 물이 그냥 낯설기만 하고 좀체로 정이 느껴지지 않는 듯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나는 민이를 꼭 끌어 안고 뺨을 대었다.
이 골짝골짝마다 엄마는 꿈을 묻고 뛰어 다녔단다. 얼음이 얼면 아버지는 썰매를 만들어 주시고 썰매를 지치는 우리 남매들이 쬘 수 있게 개울가에다 화톳불을 피워 주셨다. 그 때 깨어진 얼음 사이로는 눈물처럼 맑은 개울물이 흘렀고, 산판에서 베어 낸 목재가 돌타랑을 굴러내리며 내는 텅빈 울림이 산곡을 휘돌아가고는 했다. 봄이면 그리움처럼 눈부시던 산수유와 진달래와 복숭아 꽃들, 언제나 아득한 그리움에 가슴 저렸던 내게 아버지는 먼먼 옛날의 얘기들을 들려주시며 꿈을 다독여 주셨다. 그런 아버지를 외면하고 지난 5년을 살앗다니....
민이를 안고 그리움에 젖어 내다보는 창 밖으로 전흥국민학교의 나지막한 교실들이 지나갔다. 마을부근의 학교는 분교이기 떄문에 운동회 땐 이 곳까지 내려왔었다. 아버지는 공책 두 권을 받은 딸을 기특해하시며 자장면을 사 주셨고, 돌아오는 길에는 업어서 데려다 주셨다. 그런 아버지가 고아로 떠돌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다는 내 말을 들으시고는 노발대발 하셨다. 못내 가슴 아파하시며 만류하셨지만 나는 내 뜻대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 남편과 결혼했다.
금학을 지나고, 시거리(三路)를 지나 무덤이 많아 무덤실로 불리는 친정 마을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이었다. 아직도 가난하고 나지막한 옛집을 보며 나는 "아부지요"하고 불렀다. 엄마가 뛰어 나오셨고, 아버지도 뒤따라 나오셨다. 마당에서 장인 장모에게 절을 올리는 남편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쇠약해 보였다. 잠시 나를 건너다 보시고는 아버지는 사립문 밖으로 나가 버리셨다. 울음이 솟구쳐 뒤따르려는 나를 엄마가 만류했다. 너무 기뻐서 저러시는 걸 거라고 하시면서. 그래도 남편한테 민망했고 반겨하시지 않는 아버지가 새삼 서운하고 야속했다. 엄마는 군불을 지피시고, 저녁상을 보시며 씨암탉도 잡으셨다. 나는 아궁이에 피어오르는 불빛을 보며 고개를 무릎에 박고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다렸다. 닭이 다 고일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어두워진 마당에 눈송이가 내리는 게 내다보였다. 아버지는 지금쯤 시거리 주막에서 막걸리를 드시고 계실 것이다. 아직도 당신의 안타까움은 풀리지 않은 것일까. 쉐타를 걸치고 시거리 쪽으로 나서는 나를 따라 남편도 나왔다. 차가운 눈발이 얼굴에 아픔처럼 와 부딪쳤다. "아니? 장인어른께서..."하며 달려가는 남편의 앞쪽에 지게를 지고 올라오시는 아버지가 보였다.
"첫 친정길에 그냥 돌려 보낼 수야 있나. 시거리 정미소서 쌀 한 가마 찧어 왔다." 지게를 남편에게 넘기시며 숨찬 목소리로 아버지가 그러셨다. 오, 아버지. 나는 넘어오는 울음을 참느리 이를 꼭 물고 이제 막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92년 첫 서설을 첫기쁨처럼 맞고 있었다.
-1992년 1월 10일(금요일) 매일신문 26페이지 독자 콩트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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